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웨덴의 잉리드 공주 (문단 편집) === 어린 시절 ===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30636170618.jpg|width=100%]]}}} || 1910년 3월 28일 오후 3시경 [[스톡홀름]]에서 왕세자였던 [[구스타프 6세 아돌프]]와 왕세자비 [[코넛의 마거릿 공녀]] 사이에서 셋째이자 고명딸로 태어났다.[* 오빠 2명과 남동생 2명을 두었다.] 5월 5일 [[스톡홀름 왕궁]]의 예배당에서 세례를 받았다. 대부모는 [[구스타프 5세]], [[바덴의 빅토리아|빅토리아 왕비]], [[나사우의 조피아|소피아 왕대비]], [[코넛과 스트래선 공작 아서|코넛 공작]], [[루이제 마르가레테|코넛 공작부인]], [[프로이센의 루이제|바덴 대공대비]], 바덴 대공비, 달라르나 공작대부인, [[헤센의 알릭스|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]], [[올버니의 앨리스 공녀|애슬론 백작부인]], [[아달베르트 폰 프로이센]], [[조지 5세|웨일스 공]]이다. 스웨덴 왕실에서 1830년 이후 처음으로 태어난 직계 공주여서 부모님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. 특히 어머니인 마거릿 왕세자비와의 사이는 매우 각별했다. 각별한 모녀관계는 잉리드가 이후 의붓어머니가 되는 [[루이즈 마운트배튼|루이즈]]와 친해지지 못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. ||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d044bc15a2108afe1e40d8b702asff5c31.png|width=100%]]}}} || || '''어머니 [[코넛의 마거릿 공녀]]와 잉리드''' || 잉리드가 10살이 되던 해(1920년)에 그녀에게 큰 슬픔이 찾아왔다. 바로 어머니 마거릿 왕세자비가 잉리드 자신에게는 3번째 동생을 임신하던 중에 갑자기 사망한 것이다. 성인이 된 뒤 남은 눈물이 없을 정도로 울었다고. > “결코 극복할 수 없는 슬픔입니다. 절대로요. 그리고 그건 아마도 내가 너무 빨리 어린 시절을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했어요. 하루가 다르게요. 아니요, 나는 다시는 어린 아이가 아니었습니다.” >---- >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그리고 어머니 마거릿이 사망한 3년 뒤, 아버지 아돌프 왕세자가 [[루이즈 마운트배튼|루이즈]]에게 청혼을 했다. 공교롭게도 루이즈는 [[빅토리아 여왕]]의 증손녀였기 때문에 마거릿은 물론 잉리드와도 친척 지간이었다.[* 마거릿하고는 5촌, 잉리드 남매들하고는 6촌관계였다. 잉리드 입장에서는 6촌 큰 언니가 느닷없이 새어머니가 된 셈.] 문제는 아돌프가 자녀들에게 재혼에 대해 언질을 주지 않았고, 이에 어머니와 유달리 각별했던 잉리드는 큰 충격을 받아 루이즈를 어머니로 인정하지 않았다. 게다가 교육을 위해 외가인 영국으로 떠나게 되어 루이즈와의 사이는 계속 어색해지게 된다. ||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f5b0dd81a8b52b66dc6eefb8d4dcd7bc0.jpg|width=100%]]}}} || || ''' 외할아버지 [[아서 윌리엄 패트릭 앨버트|코넛 공작 아서 왕자]]와 잉리드''' || 잉리드는 후에 덴마크에 시집을 가서도 자신이 낳은 딸들에게 '외할머니는 마거릿 공주'라고 누누이 강조를 했다. 다행히 새어머니 루이즈에게는 잉리드 아래의 남동생들은 당시 나이가 어려서 새어머니를 잘 따랐다고 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